서울 진입을 위한 일본의 육로롤 차단하라! 화도진지(시 기념물 제2호)

2014.02.18 11:00동구역사문화소식

서울 진입을 위한 일본의 육로롤 차단하라!

화도진지(시 기념물 제2호)


화도진과 연희진은 1876년 개항이후 일본이 험난한 강화 수로를 피해 인천을 통해 육로로 서울에 진입하려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었습니다. 인천연안에 방어 시설을 구축하기 위한 논의는 1877년 10월경부터 구체화되었는데, 1878년 8월 27일 무위소(武衛所) 소속 신정희(申正熙)를 진사(鎭舍)와 포대(砲臺)의 공역감동당상(工役監董堂上)에 임명하여 공사에 들어갔습니다. 진사는 강화로 통하는 수로를 내려다보면서도, 바다에서는 응봉산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화수동 언덕에 두었습니다.



(사진설명. 화도진)



포대 공사는 10월 15일 제물포 주변부터 축조하여 이듬해인 1879년 7월 1일 일단락되었습니다. 포대는 강화에서 실어온 석재를 이용하여 매우 견고하게 쌓았습니다. 진사가 위치한 다소면 화도리(花島里)의 지명을 다서 화도진이라고 이름하고, 무위소에서 추천한 별장의 관할 아래 두었습니다. 이때 부평 연안에도 연희진(連喜鎭)과 예하 포대를 설치하였는데, 양진에 별장(別將)을 두어 무위소자벽이라 별칭하였습니다. 화도진과 연희진의 특수한 사명을 고려하여 임기는 30개월로 하였으며 훈련도감의 지각관이나 교련관(敎鍊官) 중에 적격자를 골라 파견하였습니다.



(사진설명. 화도진도 /출처=문화재청 홈페이지)



화도진도(작자미상, 1879년 제작,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에는 화도진을 비롯한 인천 연안의 관방 시설과 도로·수로 등이 묘사되어 있어 진 설치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화도진도』에는 진영과 각 포대시설은 물론 인천도호부 관아(官衙)의 건물배치 및 산천 이름, 그리고 지금은 매립되어 사라진 연안의 섬 이름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고, 지도의 우측 상단에는 화도진에서 관할하는 6개 포대, 인천도호부에 설치된 방어영 관할 2개 포대의 읍진(邑鎭)까지의 거리도 명시되어 있습니다.

아울러 포대마다 그 명칭과 포좌(砲座)의 방향 및 포혈(砲穴)수가 묘사되어 있는데, 화도진 관할 6개 포대와 인천 방어영소속 호구·장도 2개 포대의 명칭과 포좌 수 및 현재의 위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묘도북변포대(猫島北邊砲臺) : 만석동 괭이부리선창 주변

2. 묘도남변포대(猫島南邊砲臺) : 만석동 괭이부리선창 주변

3. 북성곶북변포대(北城串北邊砲臺) : 화수동 해안 주변

4. 북성곶남변포대(北城串南邊砲臺) : 송월동 해안 주변

5. 제물북편포대(濟物北邊砲臺) : 북성동 인천역 주변

6. 제물남변포대(濟物南邊砲臺) : 해안동 고철부두 주변

7. 호구포대(虎口砲臺) : 논현동 호구포(범아가리)

8. 해안 장도포대(獐島砲臺) : 논현동 장도나루(소래포구) 주변


이 가운데 묘도(猫島)포대와 장도(獐島)표대는 섬에 설치되어 있고, 석축 혹은 흙으로 뚝을 쌓아 육지와 연결하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아울러 적의 상륙이 예상되는 해안에는 토둔(土屯)이라 쓰인 토루(土壘)가 구축되어 있으며, 응봉산(현 자유공원) 정상에는 요망대가, 파라다이스호텔이 자리한 언덕에는 해망대(海望臺)가 설치되었습니다. 토둔이 화도진 주변에만 설치되어 있는 것은 여타 해안에 비하면 개펄이 짧아 적의 상륙이 용이했기 때문입니다.



(사진설명. 화도진이 위치한 화도진공원 모습)



화도진은 갑오개혁으로 군제가 개혁되면서 모든 군대가 군부에 소속되어 철폐되었고, 진의 건물도 지방 군사 조직인 지위연대의 예하부대가 월미도에 주둔하게 되면서 일부 건축물이 헐려서 월미도 병영 건축에 사용되었습니다. 잔여 건물은 해방전 해안 매립 때 철거되었습니다. 월미도 예하부대는 포대의 형식을 갖추고 있으나, 예포를 쏘는 의전 행사의 부대로 전락되었습니다. 진은 철폐되고 건물도 모두 철거되었으나 1982년 한미수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화도진도」에 의거하여 옛 건물을 복원하여, 이 일대를 공원화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