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다리 물길 따라 동구 문화예술을 꽃피운 작가들

2014. 7. 2. 15:55동구역사문화소식

배다리 물길 따라 동구 문화예술을 꽃피운 작가들


"희곡작가 함세덕 생가는 화평동 455번지다"

그가 살았던 동네는 화평냉면 초입 근처다. 그는 창영초교와 인천도립상업학교를 다녔다. 1915년에 태어나 화평동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는 극작가를 시작할 무렵 동랑 유치진으로부터 사사한 후 1936년 조선 문학에 「산허구리」를 실으며 등단했다. 그 이후 조선일보 신춘문예 「바다제비(해연)」으로 입선, 그의 대표작으로「동승」이 물망에 오른다. 작품 대부분 인천 바다와 섬이 무대다. 민족의 고통과 슬픔, 사랑과 아픔을 대변하는 역사적인 큰 부분을 민족정신으로 이어간 것이다.





"소설작가 현덕은 화평동 78번지에 살았다"

삼화목욕탕 골목길을 따라가면 현덕이 살았던 허름한 구옥을 만난다. 현덕은 소설 「남생이」를 집필할 당시 인천에 살았다고 했다.

 「남생이」에서 노마라는 아이가 등장한다. 1930년 그 시절 노마는 “이 놈아, 저 놈아”에서 따왔다고 했다. 「남생이」는 현덕이 193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소설로 당선되면서 널리 알려졌다. 작품의 배경은 인천항만 시설이 들어선 풍경이다. 부두의 하역 노동 주변 생활상을 묘사한 작품으로 부모의 비극적 상황과 당시 노동풍경을 상세히 담아내고 있다. 특히 노마의 눈으로 본 부둣가 골목길의 묘사 장면은 당시 삶의 일상이 어떠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상권 원화작가는 남생이를 특유하고 섬세하고 따뜻한 그림체로 재현했다.





"우리나라 최초 미술평론가 이경성은 1919년 화평동 37번지에서 태어났다"

그는 해방 직 후 인천시립박물관관장을 거쳐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지냈다. 그는 인천을 대표하는 인물 중에 한 사람이었다. 우리나라 현대 미술의 지평을 넓힌 공로로 2005년 국립현대미술관이 올해의 작가로 선정하기도 했다. 그는 2009년에 타계했다.





"강경애의 소설 「인간문제」는 만석동 방직공장 이야기다"

상업 지역이었던 동구 만석동에 방직공장 노동 현장을 썼다. 방직공장은 수많은 여공들을 기숙사에 수용하여 갖은 방법으로 노동을 착취했다. 노동 생활과 환경의 생생한 현장 묘사는 한국소설의 약점이었다. 강경애는 노동운동을 본격적으로 다뤘다. 소설에 방적공장의 실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던 것이다. 1940년 동아일보에 120차례 연재 되었던 신문소설이다.





"김중미 작가 「괭이부리말 아이들」은 만석동 기찻길 옆 작은 학교 어린이들 이야기다"

아이들의 모습을 통해 절망과 슬픔을 희망으로 바꿔나가는 모습을 그렸다. 올해 「괭이부리말 아이들」책이 200만부를 돌파했다.





기자는 중앙시장 도시디자인 장혜숙(56) 공동대표 함께 문화와 예술이 서린 골목 투어에 나섰다. 장 대표는 수문통으로 흘렀던 포구(배다리,송현,화평,화수)는 작가들의 얼이 깃든 물길이라고 밝히며 “화도진 아래 물길따라 형성되었던 어촌마을이 초창기 마을이다.”라고 전했다. 송림산에서 시작해 화평철교를 지나 홍예문까지 수도 길이 뚫렸다고 했다. 화평동 골목길 옆은 수문통이라 불렸는데 1938년부터 1970년까지 공작창(무기와 철도) 제작소가 있었고 붉은 벽돌 창고가 아직도 존재해 있었다. 그 당시 일본인 요시다가 일본인 숙소를 지어 매매한 자금으로 송현초등학교를 설립했다. 송현동 66번지 일대가 일본인 관리자 사택이었다. 그 사택 주인이었던 고 손기천(90)씨가 살았던 집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동구의 골목 투어를 통해 작가들의 영혼이 살아 숨 쉬고 있는 듯해 온 몸에 전율을 느껴졌다. 함세덕, 현덕, 이경성과 김중미와 강경애의 만석동과 방적공장 이야기가 길이 보존되어 예술문학의 꽃을 아름답게 피우길 바라며, 동구 일제강점기의 건물의 흔적에서 역사를 다시 재조명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김연숙 기자 narae052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