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따라, 세월 따라 수도국산 달동네의 풍광

2014. 8. 19. 11:12동구역사문화소식

길 따라, 세월 따라

수도국산 달동네의 풍광


햇빛이 강열하여 눈이 부시고 뜨거웠다. 창영초등학교를 지나 무거운 걸음으로 우각고개에 올라서니 해묵은 집들은 세월만큼이나 나이가 들었다. 골목길은 우각로와 통하였고, 고갯길 끝자락에 펼쳐 놓은 개활지는 순박한 창영. 금곡동 사람들의 텃밭이 되고 있었다. 꽤 넓은 깨밭에서 김을 매고 있는 할머니 한분을 만났다. 수도국산을 찾는다고 하였더니, 한참 멍한 눈으로 쳐다보고는 밭고랑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저기 아파트 보이지, 거긴데, 서있는 길로 올라가면 돼” 거친 말투였지만, 촌로 같은 순박한 마음이 그 속에 배어 있었다. 감사한 마음을 앞세우고 걸음을 재촉하였다.


예전엔 수도국산을 송림산이라고 불렀다. 송림산은 동구의 가장 가운데에 있는 산등성이였다. 야트막한 구릉지에는 소나무가 그리도 많았고, 무성한 소나무의 청솔 빛은 사람들의 눈을 적셨다.



▲ 옛 수도국산 달동네의 모습



조선은 일본의 힘이 너무 버거웠다. 1883년, 개항지 제물포의 문을 열기도 전에 돈 맛을 안 일본사람들은 초원으로 이동하는 얼룩말처럼 신천지 제물포 일대로 몰려들었다. 여기서 쫓겨난 조선 사람들은 만석동, 화수동, 화평동, 송현동, 송림동 일대의 수도국산 언저리 산비탈에서 네발짐승처럼 게딱지같은 곳으로 기어나고 기어들어가는 그들의 궁상은 끝이 없었다. 특히 송림동과 송현동은 수도국산 능선을 따라 그 앞뒤로 수많은 노동자들이 신산(辛酸)스러운 삶을 대물림하는 달동네 지역으로 변모하였다.  


수도국산 달동네 가는 길을 묻고 산기슭을 탄지 얼마 되지 않아 말쑥하고 각진 아파트 숲이 앞을 가로 막는다. 옛 수도국산 달동네가 있었던 곳이다.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을 바로 뒤에 두고 옛 달동네 사람들의 삶의 풍광을 스케치해 보았다. 



▲ 옛 수도국산 달동네 자리에 말쑥한 아파트가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게딱지같은 수도국산 달동네는 한 뼘 내기 골목길을 따라서 수도국산 능선에 닿았고, 고갯마루를 넘어 동인천과 인천항으로 통하였다. 골목길 초입에 구멍가게가 있었고 연탄집도 있다. 복덕방과 쌀가게를 하는 할아버지 사장님도 계셨다. 까칠한 아저씨는 이발을 하고 아주머니들은 솜틀집에서 서성거렸다. 만화가게는 동네 꼬마들이 살고 싶어 했던 곳이다. 아이들은 가파른 똥 고개를 오가면서 구슬치기도하고 고무줄놀이도 하였다. 정신없이 숨박꼭질과 말뚝박기를 하다가 끼니도 잊었다. 뻥튀기 아저씨도 ‘뻥이요’라고 고래고래 목청을 높였다. 여름철은 지붕이 새고, 겨울은 매서운 바람이 밤잠을 설치게 하였고, 구공탄은 한 뼘내기 아랫목만 데워 놓았다. 겨울철의 가장 무서운 강도는 연탄가스였다. 겨울의 추위는 머리맡에 떠놓은 냉수를 쨍쨍 얼게 하였다. 전기불은 시시 때때로 껌벅이다 나가 버렸다. 고지대의 어린 아이들은 물지게를 지고 게걸음을 하였다. 김일 선수의 레슬링 시합이 있는 날에는 아랫동네의 전파사 앞에는 아이, 어른이 따로 없었다. 추석은 골목마다 폭음탄 소리로 가득했다. 설날은 공터에서 하늘 끝까지 소망의 연을 띄웠고, 세배 돈으로 딱지를 사고 뽑기도 하였다. 그때 그 시절의 수도국산 달동네 사람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을까?


수도국산 청솔들은 예나 다름없이 여름을 즐기고 있었다. 


남장현 실버기자  beat013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