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따라 세월따라, 근대 역사가 살아 숨쉬는 화도진(花島鎭)

2014. 11. 6. 11:18동구역사문화소식

길따라 세월따라, 근대 역사가 살아 숨쉬는 화도진(花島鎭)


수도국산에서 화도진으로 가는 길은 가파르고 비탈졌다. 내리막길은 한참 만에 평탄한 길로 이어졌다. 송현시장과 수문통을 지나 오르막 길을 올라서니 화도진공원이 눈앞에 걸친다. 공원 한가운데로 난 소담스런 길은 화도진으로 들어가는 길손들을 안내하였다.


화도진은 "꽃이 많았고, 화수동에서 가장 큰 마을이 있었다."고 해설사는 능숙하게 이야기를 이어 갔다. "화도(花島)마을 사람들은 야산에 올라 서해를 바라보며 한해의 소원을 빌었고, 저 멀리 월미도를 볼 수 있는 그 중심에 화도가 있었다."고 목청을 돋우면서 화도의 역사적 의미를 설명해 나갔다.



▲ 꽃처럼 화사한 화도진 대문



특히 병인양요 이후에는 화도 일대가 군사적으로 그 중요성이 커지면서 화도에 수군방어기지를 만들어 화도진이라고 고종황제는 명명하였고, 1882년에는 한미수호 통상조약이 이곳 화도진에서 체결되었다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1866년 병인사옥 때는 프랑스 해군제독 로즈의 함대가 강화성을 공략하기 위해 작약도(물치도)에 잠시 정박한 일도 있었다. 잦은 외세의 침략으로 한양의 관문인 인천에 대한 방비책이 거론되면서 고종16년(1879년)에 서해의 방어를 위해 어영대장(신정희)으로 하여금 포대와 청사를 짓게 하였다. 화도진은 만석포구와 북성포구, 제물포, 호구포구, 묘도(괭이부리) 포대 등 7개의 포대를 관할한 군사요충지였다. 그리고 1882년 조선의 정권대신 신헌과 미국의 정권대사 슈펠트 제독이 한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역사의 향이 묻어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 조약으로 인해 1883년에 인천항이 개항하였고, 1992년에는 한미수교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 표지석을 제막하였다.



▲ 두 조각의 석주가 하나로 된 한미수교 기념비



야외 전시장에서 한미수교 기념비를 관람하고 화도진 청사로 발길을 옮겼다. 사랑채와 동헌을 지나 안채 마당으로 내려오는 계단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순간 구한말 조선시대에 살다 나온 기분이었다. 해설사의 얼굴 또한 수고의 빛이 묻어났다.


화도진은 오늘도 인천시민의 발길을 기다리고 있었고, 가을 햇살은 눈이 부시게 쨍쨍거렸다.


남장현 실버기자 <beat013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