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2. 28. 11:00ㆍ동구역사문화소식
3·1 독립만세운동 인천지역 발상지
'창영초등학교'
인천 최고의 공립보통학교인 창영초등학교는 순수민족자본으로 건립되었습니다.
1907년 4월 1일에 발포된 보통학교령에 따라
1907년 5월 6일 관립 인천일어학교 교실 하나를 빌려 학생을 모집했는데,
개교 당시 학생 수는 3명이었습니다.
설립 초기 학생들의 연령은 5세부터 25세까지 다양했는데,
제1회 졸업식은 1910년 3월 26일 열려 18명의 졸업생이 처음으로 졸업장을 손에 쥐었습니다.
이후 제령학교를 병합했고 1907년 12월 9일 교사를 신축하여 현재의 위치인 창영동으로 이전했습니다.
1912년 4월에는 인명학교를 병합하고 그 교사를 뜯어 이를 본 교사에 연결하여 증축했으며,
1916년 이후 여러 차례의 교사 및 운동장 확장공사를 실시하였습니다.
현재의 붉은 벽돌 건물은 1922년에 다 허물어질 듯한 건물을 헐어내고 새로 지은 것입니다.
교사는 일제 전반기 건물로서 일자형 단순배치에 벽체 상단은 복공화강석으로 만든 아치형을 이루며,
현관은 홍예석으로 만든 초기 근세풍 양식입니다.
또 외형은 대칭입면에 넓은 창과 평활한 면이 직선을 강조하고 있으며,
지붕에는 도머창(지붕아래 방을 밝게 하기 위하여 설치한 지붕의 창)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교실 내벽은 나무 졸대 심을 넣고 흙을 발랐습니다.
(출처 : 창영초등학교 홈페이지)
현재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16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창영초등학교는 3·1운동 당시 인천만세운동의 진원지가 되어
당시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위를 벌이다 투옥되는 등
격동의 역사를 거치면서 역사상으로도 교육상으로도 큰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당시 재학 중이던 김명진, 이만용, 박철준, 손창신 네 명이
학교 전화선을 끊고 동맹휴교를 선언하며 시위를 주도하다가 투옥되기도 했습니다.
(3·1 독립만세운동 인천지역발상지비 / 출처:창영초등학교 홈페이지)
창영초등학교는 이들의 높은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1997년 3월 교정에 기념비를 세웠으며,
2011년부터는 인천 동구청 주관으로 3·1절 기념식 및 만세운동 재현행사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4·19 때는 창영초등학교 학생들이 거리로 뛰어나와 시위 행렬과 행동을 같이 하고
일부는 국회의사당을 점령, 요구 조건을 관철시키는 용기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창영초등학교 옛 교패 / 출처:창영초등학교 홈페이지)
창영초등학교의 교명은 '제1공립보통학교(1933년)', '창영보통공립학교(1936년)', '창영공립심상소학교(1938년)', '창영공립국민학교(1941년)', '인천창영국민학교(1945년)'를 거쳐
1996년 현재의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한편, 창영초등학교는 야구부가 유명한데요. 류현진 선수의 모교로도 유명합니다.
(출처 : 류현진 트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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